"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을 파면한다."
4일 그토록 바라던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었다.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에도 홍가(20, 트랜스에이젠더, 대전 서구, 작가 지망생)는 광장에서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파면이라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122일을 광장에 서있었던 홍가를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들을 만난 이야기를 계속해 써가려고 한다.
홍가를 처음 본 건 한겨울이었다. 집회 초기였으니 12월이었을 거다. 추운 날씨에도 그는 외투를 벗어 허리에 묶은 상태로 온몸을 흔들어 깃발을 휘날렸다. 그 자태와 스킬이 남달라 눈길을 끌었다. 그다음에 봤을 때는 아예 얇은 봄옷 차림으로 깃발을 흔들었다. 깃발 펄럭이는 소리와 깃대 휘두르는 소리가 눈으로 들리는 듯했다. 기수가 얼마나 멋있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내 핸드폰에는 어느새 그의 사진과 영상이 쌓여갔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그를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매번 광장에 갈 때마다 그가 왔는지부터 확인했다. 3월 말, 그가 광장에 나왔다! 다른 지역에 잠시 일하러 갔었단다. 사정이 생겨서 돌아왔다고 했는데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홍가는 고2 때부터 주로 낮에는 글 쓰고 밤에는 알바를 하며 혼자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양극성장애가 심해져 치료에 집중하느라 학교는 중퇴했다. 그를 버티게 해주는 것은 '소녀전선'이라는 게임과, 게임 속 최애, 그리고 그의 글을 지지해주고 사랑해주는 독자이자 덕친이다. 그들이 삶의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직히 게임을 잘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는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주제와 '끝없이 고난을 겪는 사람'에 대한 스토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12월 3일, 그는 출근해서 잠시 '엑스'(옛 트위터)를 하면서 농땡이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계엄'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놀라서 다시 확인해 봤는데, 분명히 실제 상황이었다. 그 순간의 감정을 뭐라 해야 할지 그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온갖 감정을 한 겹 한 겹 떼어내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그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치 않은' 감정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패닉. 혼돈과 혼란 속에서 두려움과 분노, 불안이 뒤엉키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용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항거하지 않고는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정의감이 불타올랐다.
그간 그는 기껏해야 '시시한 약자의 편'을 든 정도로 살았지, 정의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대통령이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막연한 투덜거림에 가까웠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에게 정치란 너무 귀찮고 일상과 먼 이야기였다. 그런데 진짜 계엄이 발령되고, 밖에서 작은 소리만 들려도 탱크가 지나가는 건 아닐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바로 삶과 직결된 문제로 다가왔다. 그는 새벽까지 계속 엑스를 새로고침 하면서 국회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했다.
"저는 끓는점이 그렇게 낮은 사람이 아니에요. 참고 또 참는 편이에요."
그런데도 그는 들끓었다.
불의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동이 틀 무렵 사장이 전화해서 별일 없는지 확인하고, 계엄이라니 "완전 미친놈"이라며 한바탕 욕을 했다. 그런 감정 표출로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던 그는 서둘러 퇴근한 후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여의도로 가야 할지 광화문으로 가야 할지 정확한 정보도 없이 무작정 기차를 탔고, 종일 국회의사당 앞을 지키던 시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몇 번 더 서울에 갔지만, 비용도 시간도 부담스러웠다. 대전에 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 후부터는 주로 대전 집회에 나왔다. 중학교 때까지 충청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자란 그에게 대전은 인프라도 잘 갖추어지고 물가도 비싸지 않은 살기 좋은 도시다.
계속 집회에 나가기로 마음먹고 그는 깃발을 만들었다. '인형인권연대 촛불행동본부.' '소녀전선'에 나오는, '인생의 큰 지분을 차지한 밈'을 한쪽에 담았다. 여기서 인형이란 사람의 감정을 담은 게임 속 로봇을 말한다. 그때는 퀴어 퍼레이드에서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지, 깃대를 부러뜨려먹을 정도로 알뜰히 쓰게 될 줄 몰랐다.
2차 남태령대첩에 갔다가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인해전술로 시위대를 압박했을 때, 경찰들을 비집고 들어가다가 깃대가 부러졌다. 키가 두 뼘은 큰 경찰 세 명이 그를 막아섰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그는 기어코 그들을 뚫고 달렸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