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이 나와!" 한 마디에 아버지를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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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이 나왓!" 양강면 죽촌리 외함마을에 들어선 경찰들은 보도연맹원 명부를 들고 다자고짜 월성이를 외쳤다. 마을 초입에 살았던 오월성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영문도 모른 채 사립문을 나섰다.

경찰들은 고샅길을 훑으며 중함마을과 내함마을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을 붙잡아 들였다. 죽촌리를 포함한 양강면 보도연맹원들이 GMC 트럭에 실려 영동경찰서로 이송된 것은 1950년 7월 18일. 이들은 이틀 후 영동읍 어서실과 설계리 석쟁이에서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외함마을 오월성은 사실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다. 같은 마을 이월성이 보도연맹원이었는데, 경찰이 성을 부르지 않고 '이름'만 불렀기에 학살대열에 합류된 것이다.

황당한 사건이 발생한 지 58년 만에 오월성의 아들 오운영 집을 찾았다. 아버지가 죽은 사연을 이야기하는 오운영의 이야기에 나는 기가 막혔다. 아버지의 초상화를 들고 이야기하는 오운영의 눈매는 서글프기만 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유족들의 진실규명 신청 여부와는 상관없이 민간인 피해실태를 조사하기로 했다. 2007년부터 실시한 '시·군별 피해자 실태 조사사업'이 그것이다. 충북에서는 2007년도에 청원군이, 2008년도에는 영동군이 선정됐다. 2008년 8월 5일 영동군청에서 조사단 발대식을 가졌다. 영동군 내 401개 자연마을에 대한 전수조사가 시작됐다.

영동군 곳곳에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깃들어 있다. 그만큼 일제강점기 농민운동과 사회주의운동·협동조합운동이 충북에서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그렇기에 해방 후 영동사회는 신생조국 건설을 둘러싼 좌·우익 투쟁이 격렬했으며, 한국전쟁기에는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이 자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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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의 모스크바로 불린 양강면 양정리는 영동군과 충청북도의 최고 좌익지도자 장준의 고향이다. 장준과 그의 친척은 해방 전후 영동군의 사회운동에 지도자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청년운동부터 1946년 추수봉기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다 보니 전쟁 직후 보도연맹 사건과 형무소 사건으로 줄초상을 치르게 되었다. 장준 집안의 족보를 구해 장준 일가의 희생도를 그렸다.

황간면 신흥리와 남성리 사이에 있는 다리는 소위 '황간의 3.8선'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만큼 좌우익 투쟁이 격화했던 곳이다. 황간면은 영동읍·양강면과 더불어 사회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다. 2008년 황간면을 조사할 때만 하더라도 마을 노인들이 한국전쟁 때의 상황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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